한국광물자원공사 광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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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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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업정책

  • 일제 침략기의 광업행정을 보면
  • 첫째, 「광업법」 제정으로 광업행정 수행기반조성
  • 둘째, 국영 지질광물연구소를 설치, 지질도작성, 선광시험연구 및 선광시험 실시
  • 셋째, 광업조성기관으로서 광업진흥주식회사를 설립, 조성사업 및 장려사업 전담
  • 넷째, 태평양전쟁시에는 산금장려를 위해 금산개발주식회사를 설립 전쟁말기에는 금산을 정비하고 철, 니켈, 망간, 동, 연, 아연, 중석 등 전쟁물자의 생산에 주력하게 됩니다.

조선광업령 제정공포

1905년에 공포되었던 「광업법」을 수정.보완하여 1915년 일본어로 된 「조선광업령」을 공포하였는데 주요내용으로 선출원자에게 우선허가, 3년간 광산세 감면, 토지사용권 수용 및 외국인의 새로운 광업권 취득 금지 등을 담고 있습니다. 「광업령시행규칙」에는 출원 수속할 때에 광구도(축척 : 1/6,000)와 광상설명서를 제출해야 하며 매년 말에는 연간 생산량 등 광업 명세보고를 의무화하는 등 체계적인 광업활동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나 이는 일본인 광산개발 독점을 위한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 법령에는 맹목적 출원을 막기 위한 규제와 광업장려정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업육성정책

조선총독에 의한 통치가 시작된 1910년부터 농상공부 상공국 광무과에 의해 전국규모의 광상조사가 실시되어 1917년까지 광상분포에 대한 윤곽을 파악하였고, 1918년에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를 설립하여 지질도(축척 : 1/50,000) 작성 및 화석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1922년에 연료선광연구소를 개설하여 석탄의 이용시험과 탄전조사를 전담하게 하였고, 같은 해 제철업자에게 장려금을 지급하기 위해 「제철업장려법」을 적용시키게 되었습니다. 산금정책으로 1932년부터 금광산에 탐광장려금을 교부하였고, 1933년에는 저품위 금광석 매광장려금까지 지급하게 됩니다. 또한 금광산에 대한 선광설비 소요자금의 70%까지 장려금을 교부하였고, 1938년 이후에는 특수광물광산에도 확대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광업조성정책은 만주사변 및 중일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조달을 위한 대금결재수단으로 금의 필요성에 의해 취해진 조치였으며, 1937년에는 급기야 「조선산금령」이 공포·시행되기에 이르렀고, 공포 전에는 그 기본으로 “산금 5개년계획”이 수립된 바 있습니다. 금 이외의 주요 광물증산을 위해 1938년에 「조선임시조세증징령」을 공포하고 아연광, 유화철광, 중석광, 수연광, 니켈광, 흑연, 운모 및 형석 등 특수광물에 대한 광산세를 면제하였으며, 같은 해에 조선 중요광물 증산령을 공포하는 등 광업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광업기술에 대하여 살펴보면,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조선광업령」이 제정·시행되고 외국자본에 의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광산개발이 현대화되어 갔습니다. 1915년부터 착암기에 의한 채굴작업이 시작되고 광산 전용도로 및 철도가 건설되고 동력시설을 갖추면서 대량생산 체제로 바뀌게 되었고 금의 청화제련시설에 이어 대규모 선광장도 건설되었습니다. 또한, 1917년에는 사금채취용 준설기가 투입되고 겸이포제철소도 건설되어 1915년 가동에 들어가 연간 12만톤의 선철 및 강철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진남포제련소도 1915년 조업을 개시하여 조강생산을 하였고 1925년 시설이 확장되어 연 제련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당시 시설규모는 연간 12만톤의 처리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중석광은 1936년에, 수연 및 망간 광산개발은 1938년에 각각 시작하였습니다.

광업생산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이후 광업개발을 통한 착취를 위해 여러가지 광업관련 법령을 제정·시행함으로서 광업의 활성화를 기하였고, 생산된 광산물을 거의 침략전쟁의 물자 조달에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은 대외무역의 결재수단으로 금이 필요하였고 조선 등 중공업원료로 철광과 해군함정의 연료인 무연탄의 확보도 절실하여 이들 3가지 광종개발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광산물생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재령 은율철광산은 합방이전 통감부 시절에 이미 강점하였고 사동리탄광은 합방과 동시에 차지하였으며 1910년 이후 일본 광업회사들이 대거 한국에 진출하게 됩니다. 광산개발에는 민간업체뿐만 아니라 일본해군성이 탄광개발에, 상공성이 철광개발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일본침략기의 광업현황을 보면 1915년 광구수가 1,183개, 1930년에 2,128개, 1943년에는 10,500개로 「조선광업령」이 공포된 1915년에서 1943년까지 연평균 증가율이 8%에 달합니다. 금의 경우 1915년 총 가행광구 309개중 금은광산 가행광구가 254개로 전체의 82%를 차지하였고 생산량은 6.1톤 정도였습니다. 최대 생산은 산금 5개년 계획기간중인 1939년에 29.1톤이었으며, 1937년에서 1942까지는 연간 22톤 이상씩 생산하였습니다. 철광석 생산량은 1930년 53만톤, 1940년 118만톤, 1944년에는 333만톤까지 증산되었고, 무연탄은 1930년 47만톤, 1940년 315만톤, 1944년에는 453만톤이 생산되었습니다. 유연탄도 1940년대에 연간 250만톤 수준으로 생산이 되었습니다. 전쟁무기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석의 경우 1930년 11톤, 1940년 4,218톤, 1944년 8,333톤 생산으로 대폭 증산되었으며, 또한 주요 광종으로서 1944년에는 인상흑연 28,427톤, 토상흑연 74,879톤이 각각 생산되었고, 마그네사이트가 15.7만톤이 생산되었습니다. 이외 주요 생산광종으로 동과 비금속광물인 형석, 운모, 석면, 고령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인에 의한 광산물 생산액 점유율이 83.8%, 조선인이 9.8%이고, 나머지 6.4%가 기타 외국인에 의해 생산되기에 이릅니다. 광산물 총생산에 대한 광종별 점유율은 금이 62%, 철 14.3%, 석탄 12%, 동 3%, 중석 2%, 흑연 1%정도이고, 기타 광종이 5.5%를 약간 상회하였습니다. 광산종업원은 1925년 10인 이상인 광산 213개에 총 3만명 정도였으며, 광종별 광산수를 보면 금은광 9개, 철광산 7개, 탄광 12개, 동광산 1개의 분포를 보이게 됩니다. 종업원 500명이상의 광산이 15개였으며 이중 1,000명이상인 광산이 5개가 있었습니다. 제일 큰 규모로는 사동탄광으로 약 1,500명이 종사하였습니다.

시기별 광업동향

1910∼1920년대의 광업

한일합방이 된 해인 1910년에 일본 이외의 외국인 소유 광산의 총생산액은 60%, 일본인 34.5%, 한국인 5.5% 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5년 「조선광업령」이 공포되고 외국인의 신규광업권 취득이 금지되면서부터 외국인이 한국 광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저하되고 일본인의 한국 광산 점유율이 급격히 증가되어, 1918년에는 일본인이 80%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한국 광업이 일본에 의해 점거되어가자 일본의 광업가가 한국 광산을 대규모로 개발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진남포 제련소, 노량진 선광 제련소 등이 건설되고, 직산에는 최초로 사금선(砂金船)에 의한 대규모 광업이 개시되었으며, 개천·금강·갑산 광산 등이 일본 광산 회사에 의해 조업되고 겸이포 제련소도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21∼1930년대의 광업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한국 광업은 한때 성황을 보였으나, 전쟁이 끝남에 따라 금 이외의 모든 광물에 대한 수요는 감퇴하였을 뿐 아니라, 점차 한국 광업은 침체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 식산국 연료선광연구소가 설립되고, 1920년과 1926년에 광업에 관한 법령을 개정하여 광구세를 감소시키고, 「광업령」중의 광물수를 증가시키는 등 적극적인 광업진흥책을 시행했으나, 전반적으로 1920년대 한국 광업은 불황과 침체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1931∼1945년대의 광업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의 국내 정세의 긴박화와1931년 12월 일본의 금수출 재금지로 폭등한 금의 시세 등으로 인해, 1920년대 침체기였던 한국 광업은 활력을 다시 띠게 되었습니다. 또한, 1937년 중일 전쟁의 발발로 군수자원의 조달이 필요하게 되자 일본은 「조선산금령」을 공포하고 1938년 5월에는 「조선중요광물증산령」을 공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1년 말 796개였던 광구가 1937년에는 6,513개로 늘어나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지하자원의 개발은 필수적이었고 일본은 채산을 고려하지 않은 거대한 자본을 한국에 진출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44년에 한국 광산액은 1931년의 20배인 5억원에 달하였고, 광산수도 1945년에는 700여개소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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